인생은 제로섬게임
#그러니까 화낼 일도 울 일도 없는 것이다.
시험에 떨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 봤는데 딱 한문제만 더 잘봤어도 좋았겠다. 컷에서 약간 모자랐다. 내년에 또 봐야되나, 공부할 생각에 확 짜증이 올라왔다. 이럴거면 향이랑 놀을걸. 이제 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른다는데 시험때문에 포기한 것들이 생각났다. 선배가 아쉬워말라며 다독였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세상에는 여우의 신포도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반면 어떤 신포도를 가져와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물론 어찌할 수 없더라도 방법은 없다. 그냥 속상해할 뿐. 이 단계를 넘어갔다면 감정을 조금 소비하고 나면 괜찮아지는 것들이 있고 아닌 것들이 있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은 이 정도로 소모하면 그만이었다.

가벼워진 느낌이 들 때면 결국 탄수가 땡긴다.
오늘 이렇게 화가 나려고 했었던 건지 아침에 탄수화물이 엄청 땡겼다. 지난밤에 못 먹었던 딸기맛 그래놀라를 한주먹씩 집어먹은 것은 물론 밥을 먹고서도 인절미맛 과자를 집어먹다가 끝끝내 팝콘까지 집어먹었다. 정신이 들자 물을 벌컥벌컥마셨다. 기분이 좋지 않은 배부름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오후의 짜증나는 상황에 대해서 조금만 화내고 잘 넘어갈 수 있었던 거 같다.
먹기 전엔 약간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 좋았으나 결국엔 탄수로 메꿨고, 메꾼 탄수는 나의 인성보정에 쓰였다. 더불어 오늘 미친 강도의 운동을 했는데 탄수가 없었다면 안 좋았을 것이다. 비록 비정제가 아니라 정제를 먹어서 아쉬웠지만 이런 아쉬움은 뭐 신포도로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혀지듯이
흔히들 사랑은 사랑으로 잊혀진다고 하든가. 바꿔말하면 사람에게 받은 분노는 사람의 호의로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 물론 이 경우에는 사람의 호의가 누군가의 악의 때문에 약간 잊혀진 사례지만.
갑자기 PT샘이 악세사리를 할 수 있냐 묻기에, 잘 안되는데 할 수는 있다고 말씀드렸다. 갑자기 팔찌하나를 내보이셨다.

제주도를 다녀온 김에 사왔다고, 선생님도 하나 하고 계신다며 자랑하셨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때. 다음에 또 보면 되지. 까맣게 잊고 열심히 운동을 땡겼다.
불쾌한 카톡
그리고 카톡창을 봤는데 동기언니에게서 카톡이 와있었다. 자세한 말은 못하지만, 시험 불합격에 대해 맘껏 얘기하고 있는 불쾌한 내용이었다.
‘어쩌라는거지?’
절로 든 생각. 정말 화가나서 나도 모르게 다른 동생에게 하소연을 하며 화풀이를 해버렸다. 그 애도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언니답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에 부끄러웠다. 그 감정에 선생님이 주신 작은 행복도 까먹어버렸다. 그렇게 분노를 쏟아내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다른 동기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무국을 먹으러 오라고. 그 말에 나는 ‘언니, 우리 불합격파티하자. ‘라고 하는데 웃음이 픽 나버렸다. 그래, 내가 불행을 다루는 방법은 이런거였지.
(그리고 내가 화풀이했던 동기는 무슨 마음인지 알 것같은, 치킨 기프티콘 하나를 보내줬다. 고마워. 내 불합격파티에 써먹을게. 생각했다. )
결국은 사고로 마무리하는 것
그리고 직장에서 실수를 했다. 최근에 그래도 잘 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자랑도 나름 했다. 하지만 오늘 사고를 쳤고 세시간을 나의 실수 때문에 팀장님과 부장님을 머리싸게 만든 것이다.

나 이 직업이 맞는걸까. 계속 생각했는데 예전에 알바할 때 직원언니가 했던말처럼 뻔뻔하게 버티자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너무 주눅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너무 주눅들어있었다면 다들 불편해했을 것이다. 팀장님은 “실수도 해보고 배우는거지”했지만 탐탁치는 않은 표정이었다. 아마도 이번 나의 실수는 팀장님에겐 신포도 정도로 대충 해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휴. 다행이다. 신포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라서.
아무튼 나는 요새 사회에서 쌓아왔던 경험치를 다 잃어버리고 사는 것같다. 내가 내선전화의 여왕이었던 사람 맞나, 운전은 자신있다며 뺑반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나 맞나. 다 없어지고 다시 스물다섯살 초년생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나 잘할 수 있겠지. 이 험한 세상 맘껏 남탓하며 살을 거다. 나를 식물처럼 방치한 죄예요. 그 죗값을 치르세요 팀장님! 해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