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인 없는 사과편지는 등기처럼 언젠간 전해질까
#미안하다는 말의 길이
문득 찾아온다 이상하게.
나는 잘못한 걸 쉽게 못 잊는다. 오래된 흉터처럼 가끔씩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들이 온다. 간밤에 몸이 아파 앓던 때가 하필 그런 날이었다. 엄마 집이 하필 좀 추웠다. 나는 생리첫날에 운동을 다녀온 사람이었고, 이불없이 춥게 잠들었다. 깨어나서 엄마가 싸준 집김밥을 먹었다. 그게 바로 아픔의 표면장력을 깨버린 한방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중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지하철과 버스를 탔다. 집에오니 등은 오싹하고 속은 너무 안 좋고 상태가 좋지 못했다. 자주 아프지않아서 몰랐는데 아프니까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싶었다. 근데 또 말하면 뭐하겠어, 아무것도 못해주는 걸. 하며 눈을 감았다. 그때 문득 어떤 날이 떠올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그날은 판교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당시 나의 회사는 용인이었다. 회사에서 나는 불안정한 상태였고, 그 회사는 나를 어디든 쫓아내려 혈안이었다. 매일 아침 죽지못해 출근을 하고 퇴근할 때까지도 마음에 돌덩이 하나 크게 얹어놓고 지냈다. 그날 하필이면 아프다는 전화가 왔다. “나 아파..”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얼른 자라는 말과 함께 금세 끊어버렸다. 그앤 그게 사무쳤던 거 같다.

정상적퇴행이라는 것
유튜브에서 이런 영상을 봤다. 우리는 의지하고 싶은 이가 생기면 아이가 된단다. 징징거리기도 하고 아이같아진다고.
https://youtu.be/tCQ59ori-qY
참나, 이걸 왜 이렇게 아플 때 봐서 생각나게 하느냐는 말이지. 등에 가시 박힌듯 앓는 와중에 계속 수신인 없는 사과를 보냈다.
“미안해, 네가 그런줄 몰랐어. 그만큼 나한테 의지했는지 몰랐어. 근데 그땐 나도 힘들었어. 그것만 알아줘. 나도 그때 퇴사당하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느라 오래걸렸단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미안해. 몰랐어”

지금의 나는
나는 지금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힘들었니? 하며 눈물도 닦아줄 수 있고 내가 스펀지가 되어주겠다며 꽉 끌어안아줄 수도 있는 상태다. 얼마전에 직장 동기들이랑 술을 마시다 이런 얘기를 했다. “연애를 오래하면 나의 밑바닥을 봐. 서로의 밑바닥을 보게 돼.”
그래서 장점은, 누군가가 흔들리고 여유없을 때 보이는 알 수 없는 행동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행히 나는 감정에 있어서는 문일지십은 안되더라도 문일지일 정도는 되는 사람인 것이다.
어떤 것은 등기같아서 수신인에게 어떻게든 전해진다
어제 간밤에 아파서 앓았어, 근데 그런 마음이 들어서 서럽고 슬펐어. 라며 Y선배에게 얘기하니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울지마라, 그런 사과도 등기처럼 어떻게든 전해지니까.” 그 말에 근무하다가 눈물이 핑 돌아버렸다. 그래, 어떻게든 전해진다면 다행이다. 정말로 미안했어. 늦게서야 알아서 미안해. 너무 매정하게 떠나서 늘 미안했어.
어쩌면 꿈은 수신인없는 사과편지를 전해주는 우체통
저렇게 아픔을 견디고 시일이 지난 날, 야간근무를 하고 온 아침에 꿈을 꿨다. 평화로운 가을의 들녘이 펼쳐져 있었고 나는 사진작가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배경에 갑자기 행인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딘가 열리는 잔치에 초대된 손님인듯 싶었다. 그 잔치가 내 잔치인듯도 싶었다. 할머니가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화가 난 얼굴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할머니 달래드리고 오라 하기에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
하니 할머니가 토라진 얼굴로 날 돌아봤다. 웃음기를 참고있는 느낌이었다. 화풀어드리려고 말을 걸자 할머니가 그랬다.
“너, 두고간 문제집이나 가져가.”
“할머니! 나 그 문제집 없이도 붙었자너. 문제집말고할머니 보러갈게”
하니 씩 웃고는 잔칫집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꿈에서 깼다. 2년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처음으로 꿈에 나온 것이라 자고 일어나서 한참을 울었다. 나의 할머니는 2년 전 짧은 투병생활을 뒤로하고 홀연히 떠나셨다.

나는 할머니가 간암판정을 받을 그 즈음부터 수험생활을 시작했고, 내가 일을 관두자 아빠는 믿는 구석이 있는 양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고왔다. 아마도 아빠는, 내가 집에 있기 때문에 간병도 하리라 혼자 생각했던 거 같다. 하지만 회사를 관두고 시험을 준비하기로 한 것은 내 인생의 명운을 건 결정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온전히 공부에만 몰두하기로 했던 나는, 할머니가 집에 오시는 걸 반대했고 어느쪽에도 모질지 못했던 아빠는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그 뒤로 고대병원, 할머니 집 근처의 병원, 우리집 근처의 병원을 전전하던 할머니는 끝내 고대병원에서 운명을 달리하셨다. 공교롭게도 시험이 끝나고 다음주의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할머니가 나 맘 편하게 시험보라고 천천히 기다리다 가셨다고 생각한다.
고모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아빠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오빠, 오빠가 돌아가시게 한거야. 오빠가 우리엄마 이리저리 끌고다니지만 않았어도 우리엄마 벚꽃도 진달래도 보고 가실 수 있었어.
누군가와 이별한 뒤엔 남은 이들의 죄책감이 남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죄책감을 어떤 이는 분노로 표현하기도 하고 외면으로, 회피로, 자기합리화로, 또는 그저 끝없는 우울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죄책감에 끊임없이 할머니에게 사과편지를 보냈고 2년 뒤 지금에서야 수신확인 메시지를 받은 모양이다.
할머니, 잘 지내? 난 잘 지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