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가는 여름을 봐도 눈물나지 않아요. 힘들어하면서도 다 해내는 어른이 되었거든.

2018. 9. 9. 22:20140자이기엔 아까운



#가는 여름이 서러워 울었던 적이 있다면






청승도 그런 청승이 따로없지.
2013년의 나는 어딘가 이상했던 게 분명하다. 6월의 언젠가 산책로를 걸어오는 길에 여름이 가는 게 너무 슬퍼서 앉아 울었던 적이 있다. 여튼 그때 기억이 또렷이 나지 않는다. 한가지 분명한 건 그때 책상아래로 들어가 울던 날이 많았고 잠을 못이룬 날도 많았다. 중간에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흑백으로 된 꿈을 꾸다가 '내가 죽었구나' 생각했을 때 정말정말 맛있는 복숭아를 먹으면서 맛이 떠오르지 않아서 '진짜 죽었구나' 했다.


(그 즈음의 나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나의 게으름에 빠져서 넘실거렸다. 그 때문인지 2015년도에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사장이 내게 '넌 성취경험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길. 존나 정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담센터에 갔었어야 할 애가 회사에 들어갔으니 곪아터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혼자서도 잘해요
어릴 때 나는 TV프로 [혼자서도 잘해요]를 참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늑돌이를 특히 참 좋아해서 늑돌이 모양 샴푸도 샀었다. 우리 엄만 절대 그런 거 안 사주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워낙 좋아해서 한번 사줬던 거 같다. 내가 정말정말 좋아했다. 그러니까 아직도 기억을 하지. 그 덕분인지 어릴 때부터 혼자하는 걸 잘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체육대회날도 혼자서 집에 왔고, (물론 도시락을 싸들고 가다가 축구공에 맞아 넘어지면서 흙묻은 포도와 참외를 들고 왔었지만..) 병원도 혼자 잘 다니고.. 그래 깁스도 몇번 혼자 하고 오고 심지어 라섹도 혼자 하러 다녀왔다. 그만큼 감정을 혼자 견뎌내는 것도 참 익숙한 것이었다.








모두 각자의 방식이 있는 법
최근에 친구가 깊은 고민이 생겼다. 그 애는 말을 많이 하는 게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간간이 해결책을 제시하면서도 그냥 가만히 들어주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상태는 어느 정도 내 안에서 해소가 다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때로는, 버틸 수 있을 때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다르고, 나의 반응과는 다를 것이다.


여름만 봐도 왈칵 눈믈이 터질 당시의 나는 스트레스를 울면서 풀어냈고, 그당시 남자친구는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했었다. 걔가 뭘 어찌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감정을 혼자 처리하는 것에는 늘 익숙했으니까. 근데 사람이 참 재밌는 게 어느순간 누군가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걸 깨달은 건 우연한 계기였다.
매일 축축 쳐지는 편지를 보냈던 탓인지 어느 날부터 편지의 답장이 오지않았다. '왜 편지를 보내주지 않느냐'는 말에 숙제가 되는 게 싫다고 했다. 다리의 힘을 풀고 걔한테 온전히 기대있던 나 자신을 발견했다. 늘 혼자 잘 지내오던 내가, 이랬다니. 하며 오롯이 혼자만의 감정을 세우는 데에 노력했다. 그래서 연애의 후반기에 그 애가 힘들어하며 기댔을 때 내가 자꾸 밀어냈던 거 같다. 혼자 버티라며, 감정적으로 기대지 말라며. 나 그때 정말 서러웠었어, 넌 아니? 하며.










최근까지도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정말 아프다고 했던 날 나에게 굳이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아프면 난 그냥 혼자 앓는 사람이기 때문에, 전화할 정도면 죽을 정도는 아니었던 거야. 생각했다. 게다가 그 당시의 나는 퇴사위기에 절벽으로 내몰려있을 때였다. 실제로 그 때로부터 2주 쯤 지난 뒤 퇴사당했다. 그때보다 내가 지금 더 자란 덕인지 아니면 그때보다 마음이 편해진 덕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가 죽을만큼 아파서 내게 전화했구나 싶다. 난 아직도 죽을만큼 아플 때 아무도 찾지 않겠지만, 세상에는 아닌 사람도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가버리라고 외치던 여름이 간다는 것에 슬퍼하던 나도 있듯이.




이젠 늦여름도, 초가을도 덤덤하게 보내게 되었다. 강남에서 양재까지 걸어왔던 어느날의 아침.







이젠 슬프지 않아요
물론 아직도 여름이 가는 게 아쉽긴 하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고 여름을 후회없이 보내고 싶다. 트위터에도 드러나있지. 여름이 오자마자 산책을 나가겠다 결심하고, 그 다음날은 정말 나가서 한숨 낮잠을 잤다. 여튼 근데 올해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워서 크게 아쉬운 건 없었다. 가는 여름을 봐도 눈물나지 않은 건.. 어쩌면 40도에 육박하는 폭염대잔치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 이정도면 많이 큰거 맞지.
올해 여름은 투잡때문에 정신없기도 했지만 여튼 잘 보낸 거 같다. 이제 나는 여름이 가도 안 슬프다. 힘들어하면서도 다 해내는 어른이 되어서일까? 아량이 넓어진 덕일까? 여튼 나는 매해 여름을 보낼 때마다 하나씩 서툴렀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내가 컸다는 거겠지.


예전에 학교 수업에서 그런 얘길 들었다. 옛날에 썼던 시나리오는 다 쓰레기처럼 느껴질거다. 그게 당연하다. 쓰레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라고. 난 그게 사나리오나 창작물에서만 해당될 줄 알았는데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늘 지난 날의 나는 너무 쓰레기같다.


내가 너무 힘들 때 그 앨 만나서 걔도 참 힘들었겠다. 의젓한 그 애 덕분에 그 시기를 잘 견뎌낸 거 같고, 감정을 추스를 땐 혼자 오롯이 버티는 거라고 알려주어서 참 감사하다. 물론 당연히 성장은 스스로의 성장이지만 걔가 없었다면 나는 완벽한 독립개체로 남는 데까지 너무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