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7. 15:41ㆍ140자이기엔 아까운
#단발로 산다는 것은 한달에 한번씩 미용실을 가야한다는 것.
박규영에서 정준하 과장까지
성숙한 여인의 느낌을 내고 싶어서 6월 초, 머리를 잘랐었다. 늘 칼단발로 자르다가 숏단발로 잘랐는데 나름 반응이 좋았다. 머리를 자른 덕인지 ‘어플로 얼굴을 줄인 거 같다’는 말도 들었으니깐 ^^v
암튼 어떤 머리였던고 하니 이 분야의 대표주자 박규영씨 머리였다. 물론 얼굴은 이렇지 않았다. 그리고 미용사에게 보여주기 머쓱해서 차마 내밀지도 못했다. 그냥 내 마음속으로만.. 박규영씨 머리였다.

그런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머리가 자라니 바가지머리가 되어버렸다. 무한상사의 정과장 느낌. 게다가 요새는 마스크를 귀에 걸어놓기 때문에 머리를 귀에 꽂기도 어렵다. 내 귀가 말랑말랑하기 때문인걸까.

아무튼 계속 정과장이 될 수 없어서 미용실에 갔다.
집근처의 미용실인데, 컷트는 25000원인 것에 비해 파마가 10만원밖에 되지 않아서 늘 가성비(?)를 생각해서(?) 경제적인 관점으로(?) 파마를 하고오곤 한다. 오늘은 매직세팅을 하기로 했다. 지난번에는 머리가 너무 짧아서 어렵다고 거절당했는데 오늘은 그래도 나름 한달 간 기를만큼 길렀다.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에게 있어 묶이는 머리는 긴 머리다.
운동을 끝내고 조금 일찍 도착했던 미용실, 직원 한 명이 어색하게 나를 반겨줬다. 견습생이랄까. 무엇을 해도 뚝딱이는 것이 누가봐도 그런것 같았다.
무릉도원이세요?
그 신입미용사는 내 머리를 감겨주고 말려주는 것을 담당했는데, 머리를 감을 때마다 "물 온도 어떠세요?", "더 헹구고싶은 곳 있으세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하고 물어봤다. 애석한 사실은, 나도 아직 신입뽕이 있기 때문에 자꾸 그의 질문에 "넵!"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회사 밖에서는 덜 씩씩하고 덜 싹싹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자꾸 나도 모르게 에너지가 빵빵하게 들어간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회사에서도 그럴 필요는 없는데. 팀장님은 나에게 '싸가지 없음'을 가르치라고 했다고 한다.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라 늘 내가 직원들에게 하듯이 싹싹하고 친절하게 할까봐 걱정이셨던 거 같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상대에게 저자세로 보일까봐 걱정하셨던 거겠지. 아무튼 이렇게 몸에 스며들어있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넵넵병을 앓는 것은 나에게도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
손을 벌벌 떨면서도 결국 해낸다는 것
머리에 열처리를 하면서 살짝 꾸벅꾸벅 졸았다. 일단 핸드폰 밧데리가 없었다. 충전해달라고 해도 됐었는데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게 어렵다. 이 시대의 소심인. 아무튼 손에 이것저것 묻힌 사람에게 충전해달라, 다시 가져다달라 하기가 뭐해서 그냥 슥슥 졸았다. 게다가 오늘의 운동은 상체조지기였기 때문에 팔쪽에 시린듯한 느낌이 느껴지며 잠이 잘 오기도 했다. 누군가 머리를 계속 만져주니 계속 졸기에 너무 좋았다. 미용실의 공기는 전체적으로 차가웠고 내 머리위는 따뜻했다. 그리고 샴푸를 한 뒤 머리를 말아주는데 옆부분만 디자이너 선생님이 말아주고 뒷머리는 아까 그 신입미용사분이 말아주셨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직 머리를 마는 게 익숙하지 않으신건가. 여러번 머리를 놓치기도 하고 그러셨다. 자꾸 그에게서 나를 본다.

갑자기 또 다른 길로 새서, 언젠가의 퇴근을 실습기관사와 한 날이 있다. 다소 미흡하더라도 양해부탁드린다며 말을 하고 정말 잘해냈으면 멋졌겠지만 실습기관사는 정말로 미흡했다. 승강장의 위치를 못맞춰서 후진을 하기도 하고 다시 전진을 하기도 하고. 누가봐도 처음인 모습이었다. 그당시의 나는 회사에서 나름 고인물이었기 때문에 귀엽다. 하며 웃었다. 만일 지금이라면. 그냥 웃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날이 있다. 나는 늘 그 상황이 되어봐야 안다고, 그 상황이 되어보지 않았어도 아픔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내 친구 K는 늘 나보다 많은 아픔을 느껴본 아이였고 나는 늘 그 애가 아픔을 느낄 땐 그 아픔을 가늠하지 못했으므로 늘 어어... 하다가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훗날에 그 애가 느꼈던 아픔과 비슷한 순간들을 지나면서 K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애에게 말했다.
"늘 너의 아픔에 뒤쳐져 있어서 미안해, 늘 나는 뒤늦게야 알아."
그 애는 아마 그랬었지.
"지금이라도 알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때의 너도 완전 모르던 건 아니었어. 늘 위로였어."
뒷머리가 찰랑찰랑...
중화를 모두 마치고 드라이를 끝낸 나의 머리는 너무 성공적. 정말 예뻤다. 귀에 꽂아도 예쁘고.. 살짝 뻗친 머리도 좋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안으로 잘 말린 머리가 뒷통수에 닿는 느낌도 좋았다. 그 신입미용사,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잘 말아낸 모양이다. 그 신입미용사는 오늘도 내일도 뒷통수의 머리들을 말겠지, 어느 날은 컴플레인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혼날 수도 있겠지. 하면서 점점 익숙해지겠지. 나도 그렇게 되겠지. 하면서 기분좋게 귀가했다. 꾸벅꾸벅 머리를 만지작 당하며 졸아서 상쾌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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