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골의 법칙, 막상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

2018. 9. 11. 22:52독립시선일기

독립시선일기
​#어느날 이방을 떠났을 때 느끼게 될 감정들

​11월부터 7월까지
폭염이 시작되고 땀이 줄줄 흐르자 언니랑 나는 짐을 싸들고 연어처럼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이 집은 추워질 때 들어와서 더워질 때 떠났다. 물론 떠나면서 영원히 떠나게 될줄은 몰랐다. 그냥 잠깐 있다 오는 거겠지라고만 생각했다. 7월 20일쯤 휴가를 받았었으니 그때즈음이었겠다. 에어컨 바람 밑에서 거실에 임시로 깔린 이불을 침대삼아 잠들었다. 엄마랑 아빠랑도 잘 지냈고 한번도 안 싸웠고 갑갑하다고 느낀 적도 없던 것 같다. 그리고 날이 선선해질 무렵 다시 돌아왔는데 슬프게도 이주공고가 났다. 11월 30일까지였지만 이주비를 빨리 받기 위해서 우리집은 9월 27일을 이사날짜로 잡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들어갈 집 도배도 해야하고.. 침대도 버리고 좁은 집 안에 짐들을 밀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갑갑해졌다. 독립자금 모아서 탈출하겠다 마음먹은 게 무색할만큼 모은 돈이라고는 얼마전 탔던 달랑 60만원. 8개월동안 정말 모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인테리어는 조금만 욕심낼걸 그랬나
씻고나와 로션을 바르다가 와삭- 뭔가를 깨먹었다. 알전구의 건전지 뚜껑이었다. 에후. 이건 또 어디다 놓는담. 다시 들어가게 될 방은 너무 좁아서 인테리어를 할 여유가 없었다. 이것들은 아마도 창고로 가겠지. 그러고보니 벽에 걸린 목화 가랜드와 캘린더 태피스트리, 스탠드, 장식선반 등... 부수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 이것들을 다 어떻게 해야되나. 그래서 다들 미니멀리스트로 사나보다. 영원하지 않고 떠나야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정말 잠깐 살아도 예쁘게 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막상 다시 돌아가려니 모든 것이 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미니멀리스트보다는 맥시멀리스트였다. 지금의 회사도 그렇다. 짐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책상은 왜 그렇게 더러운 건지. 이직을 하긴 할건지. (안 그래도 모 회사에 이력서를 넣느라 어제 10시 넘어 퇴근했다. 근데 막상 다음날 다시 읽어보니 너무나 헛점 투성이였고.. 귀찮아서 수정은 안 하기로 했다.) 여튼 나는 늘 어딘가 엉덩이를 붙이면 내 의사에 의해서 발을 떼기가 힘들다. 스무살무렵 학교의 단체 술자리에서 난 늘 붙박이처럼 앉아있었다. 누가 오면 오는대로, 누가 가면 가는대로. 지금의 학교도 그랬다. 떠나기 위해서, 정들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떠나지 못하고 정들어버렸다. 가장 친한친구도, 친했던 친구도 모두 학교에서 만났다. 지금 회사도 매일같이 현타느끼며 이직생각을 하지만, 내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많은 칭찬과 기대를 받아본 적이 있었나 싶어 쉽게 떠날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가는 것이다. 떠나고자 하는 곳에서는 늘 진득하고, 떠나고 싶지 않은 곳에서는 늘 떠나게 된다. 이걸 오르골의 법칙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요새 읽고 있는 김연수 소설가의 [언젠가, 아마도] 에서 나온 문장이 문득 생각났다.
​막상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 이건 오르골의 법칙이다. 이걸 뒤집으면 쉽게 구할 수 없다면 간절하게 원하게 된다. 이건 도루묵의 법칙이다. 그러고 보면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마치 낯선 여행지처럼 느껴질 때가 몇 번 있었다. 나 혼자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이별했을 때, 이제 다시는 누군가와 웃으며 그 거리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돌이켜보면 바로 그때가 도루묵의 법칙이 작용했을 때였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인생이란 어쩐지 낭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알라딘 eBook <언젠가, 아마도> (언젠가, 아마도) 중에서




여튼 나는 곧 떠나겠지. 예쁜 페인트로 아늑하게 꾸며놓은 이 곳에서. 그리고 거짓말처럼 좋은 기억들만 남겠지. 이따금씩 흘러나오던 어느 집의 고등어조림쩐내와 담배냄새, 먼지구덩이들, 아침이면 입구에서 사람들 뚫어져라 쳐다보던 경비할아버지도 잊은 채.. 흔히 이런걸 기억의 미화라고들 하나. 다시 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아름답고 좋게만 기억되는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 독립의 방에 누워있으면서도 어느날 내가 보았었던 아늑한 이 방을 추억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