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9. 20:47ㆍ독립시선일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과거의 나를 140자 이상의 줄글로 만나는 일은 낯선 일이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친구가 내 방 페인트 색깔을 묻기에, 친절하게도 던에드워드의 머시룸 머시기를 카카오 검색으로 찾아줬을 때
..?
블로그명: 행선의 독립일기
순간 나의 표정은
이와 같았다.
줄줄 읽다보니 집 이사를 준비하면서 썼던 블로그였던 거 같다. 회사에 연예인이 와서 저녁 10시까지 남아있던 그 순간에도 굳이굳이 노트북을 들고가서 썼던 블로그였는데 정말 까맣게도 잊어버렸다.
그래서 복기해봤다. 그 집에서의 나를.
중간에 아이패드도 샀는데, 슬라임말고 인스와 떡메로 일상을 조진 날도 있었는데. 새 집에서 쿵쾅거리는 소음에 낯설어하며 잠들던 날도 있었고,
조용한 집에서 일어나 하루종일 한 마디도 안하고 지낸 날도, 새 울음 소리가 좋아서 귀 기울였던 날도, 샐러드 배달을 시켜 마도카 마기카를 보던 날도, 만화책 세일러문에 흠뻑 빠져 지낸 날도, 집들이로 친구들 불러모아 놀았던 날도 있었고, 문 닫아놓고 엉엉 목놓아 울었던 날도 있었다.
삐걱이는 가족들끼리 가족사진도 찍어보고, 가족사진 잘못나와서 큰 소리도 나와봤고, 엄마가 우리를 그리워해 맛있는 걸 해놓았다며 메시지를 남긴 날도, 바깥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면 꼭 엄마 집에 찾아가 엄마 등에 붙어 자기도 했고, 매일 한 잔씩 마시던 맥주도 끊고 요가도 했다. 아, 중간에 헬스도 다녔지.
한 3개월 다녔는데 웨이트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곳. 그때 잡은 근육이 아직까지 유효한 거 보면 신기하다. 연장계약실패로 문닫았던 헬스장. 관장님이 내 근육을 매우 신기해하며 선수생활했었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가면 가끔 만나 인사해주셨는데 그것도 좋았다. 왠지 칭찬도 받고 싶었고 그래서.
필라테스는 그냥 그랬다. 중간에 투잡하면서 아침에 바빠져서 점점 못가게 됐다.
공기업으로의 이직을 꿈꾼 곳이기도 했고, 매일 퇴근하고 공부하는 삶을 알아갔던 곳, 차곡차곡 노트정리하고 앉은뱅이 책상에서 공부하고, 자소서를 쓰거나 직무기술서를 읽거나, 필기합격통지를 받기도 하고 필기탈락통지를 받기도 했고..
한국사 필기...
이런건 쓸데없는 것이었다. 수학문제를 풀어야 한다.
대리님이 그만두시고 새 대리님을 맞이하고, 방파제 바깥에서 사회생활의 최전방에 나서봤고, 그 사이에 연봉은 두번 올랐다. 그렇게도 싫어하던 회식이 좋아졌고, 스몰토크 하기 싫었던 회사에서는 투머치토커가 됐다.
대리님이랑 하천변에서 말싸움아닌 말싸움하고 한달 뒤쯤 화해차(?) 방문했던 파스타집 존나 채소임. 배고팠다. 이때부터 마음이 편해졌던 거 같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양이임을 깨달았을 때. 진작에 알걸 그랬어 왜 그랬나 몰라
스타벅스 기프티콘 300장 사고쳐서 회사사람들에게 6잔 샀던 날.. 로또됐냐고 다들 물었었지.
일본여행도 다녀오고 부산, 을왕리, 양양, 선재도, 영흥도 바다는 진짜 많이 다녀온 거 같다. 중간에 올림픽도 패럴림픽도 다녀왔고
정말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게 없었던 일본여행... 심지어 가서 일했잖아
석대 먼저 한국으로 보내고 난 부산에 하루 더 머물다 왔다. 부산 아울렛에서 라코스테 피케원피스 사왔는데 한번도 못입었다.
맞다 중간에 차도 뽑고 언니가 사고도 내고 그랬지.
뭐야. 사진 정리하다보니까 이것저것 많이 하고 살았잖아
그 집에서의 9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왜 이렇게 그립게 말하냐면.. 이번달에 이사를 가기 때문이다. 6개월에서 1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느리고 생각보다 이르게 이사가게 됐다. 이주공고가 붙은 현수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 시간은 붙잡아놓지 않으면 재빠르게 흘러간다. 시간을 붙잡는 방법은 기억의 핀을 꽂는 것. 나는 올해 핀 꽂을 새 없이 너무 지나가버렸던 거 같다. 나의 기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새삼 아쉬웠다. 한달에 한번이라도 독립일기를 썼었다면 훗날 저 아파트가 다 허물어졌을 때 그래도 허전하진 않았을텐데.
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는 편이다. 애착이라고 해야되나. 미련이라고 해야되나. 중3때 아빠가 버려버린 고래 인형이 아직도 생각난다면 미련이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여튼 중간에 팔아버린 내 겸둥이 경차 겸둥쓰를 보내던 마지막 날도 너무 갑작스럽게 보내버려서.. 세차한번 못해주고 물티슈로 슥슥 닦아가며 말했다.
"네 덕에 정말 재미있게 돌아다녔어. 고맙다. 잘가, 어디로 가든지 잘 가서 살어..." (차에게 하는 말 맞음)
독립일기는 생각보다 꾸준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삶의 독립(!)을 꿈꾸는 시선일기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이제 한번 해볼까.. 진짜 삶의 독립을 위한 일기를..
'독립시선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가 놀러왔던 그 다음날 (0) | 2018.09.17 |
---|---|
오르골의 법칙, 막상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 (0) | 2018.09.11 |
감추고 숨긴 것들 뒤에 가려진 것들은 무엇일까 (0) | 2017.11.16 |
“왜 그렇게 열심이야?” 에 대한 대답 (0) | 2017.11.15 |
짧게 살아도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한 기쁨을 아는 것 (0) | 2017.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