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살아도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한 기쁨을 아는 것

2017. 11. 13. 22:03독립시선일기

#2. 한번 살아도 제대로 기깔나게 살고 싶은데요


모두가 말했지, 나보고 바보라고. 

처음 작업을 시작했던 10월의 마지막 주말은 정말 너무너무 날씨 좋은 가을이었다. 그에비해 나는 벙거지에 크록스를 신고 거지꼴을 하고 손수레를 이고지고 다니고 있었다. 새삼 내가 힘이 쎄서 다행이었다. 



 16키로가 넘는 짐들을 세번씩 옮기면서 경비아저씨가 말하길


"그 집 도배가 안되어있어서 안 나가는거야"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정말로 기깔나게 해보겠다. 모두들 기함을 하며 나갔다는 이곳을 예쁘게 만들어보겠다. 생각했다




세상은 한번도 내 뜻대로 된 적이 없다. 

내가 뜻하지 않은 것만 늘 덜컥 내줬었지.

블로그에서 본 대로 보양비닐을 쫙 깔아놓고.. 제법 뿌듯해서 찍은 사진. 저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저 페인트 위에 먼지가 수북이 앉고, 저 트레이의 회색바닥이 보이지 않을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로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최선을 다해서 갈망해본 것을 얻어본 적이 없다. 언제나 막연히 생각하고, 되겠지. 생각했던 것들만 손에 넣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노력이 부족한 사람인 것 같다. 



어릴 때 튜브 크림을 쭉 짜서 내 이름을 써보겠다 생각했었다. 맘처럼 되지 않고, 나는 크림만 쭉 짜버렸지. 

자꾸 페인트칠하는데 그날이 생각났다. 지금은 내 이름을 쓸 수 있을까





멋스럽게 세팅을 다 끝내고, 샌딩작업을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벽지가 벽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다. 붕붕 떠서 울었다. 거실도 마찬가지였고, 방도 그랬다. 

'살짝.. 끝에만 떼어낼까.'


나는 늘 과거에서 배우질 못한다. 수없이 많이 생긴 내 상처들이 어쩌다 생긴 것이었는가. '이쯤에서만 뜯을까' 하다가 늘 피를 보곤 했었다. 벽지를 뜯는 작업도 그랬다. 이쯤에서만 뜯을까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크고 두꺼운 벽지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려왔다. 


당황 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어머 이게 뭐야 ㅅㅂ...'



존나 좆되었음을 직감했던 순간. 



이건 벽지를 비교적 적게 뜯어냈을 때의 모습이고, 조금 더 가면 시멘트가 보일 정도로 완전 벗겨냈다. 지금 한번 더 보니.. 새삼 또한번 괜히 뜯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아무도 애정을 주지 않은 집

공사를 하면서 생각했던 건, 누군가 애정을 준 집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 집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강 덮어버리자는 의도가 보이는 벽지상태였다. 7겹의 벽지가 차곡차곡 발라져있고, 언제 발랐을지 모르는 오래된 벽지가 시멘트에서 떨어진지 한참 된 집. 잠깐 살다가지뭐, 하는 마음으로 대충 덮어버렸을까. 86년도에 지어진 집이었으니 98년도 쯤 이사왔던 사람이 한번쯤 떼어내고 새 벽에 벽지를 발랐을 법도 한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나보다. 새삼 이 집의 신세가 슬프게 느껴졌다. 모두가 잠깐 살다갈 집. 잠깐 살다가기에 크게 애정 느끼지 않고 모자이크 붙이듯 덕지덕지 이어놓은 틈새들. 


애정이라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슬라임에 애정을 주고 있어서 평생 안사본 알콜스왑을 사봤고, 거스러미 없게 손을 늘 관리했다. 그래서 한번 더 생각했다. 누군가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공사를 하던 중에 리쌍의 '나란놈은 답은 너다' 를 들었는데, 이 노래 전형적으로 '나같은 나쁜 놈 받아줄 사람은 너 뿐이야. 내가 좆같이 굴어도 날 사랑해줄 사람은 너뿐이야.'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한번 더 생각했다. 너란 놈은 답이 없다. 




언니의 남자친구

그리고 공사 2일차. 나는 그날 아침부터 밥벌이를 하러갔다. 내가 안 온 새에 언니의 남자친구가 못을 빼주러 왔다. 내심 좋은 사람이길 바라면서, 언니는 결혼을 하고 싶다 했었으니 진중하고 건실한 사람이면 했다. 그런데 날티나고 못생긴 데다 무례하기까지한 사람이었다. 동네에서 술먹다가 꼭 '저기요. 저희도 술먹다가 심심해서 그러는데.. 같이 합석하실래요?'라며 실없는 말을 던졌을 법한. 그런 사람으로 언젠가 만났을 법한.


언니방 벽을 칠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못만 빼고 갔다. 나에게는 작업반장이라며 빈정거리고, 벽지를 뜯은 것에 대해 

'왜 뜯었냐, 뜯지 말지.. 1년 살다 갈건데 뭘 그렇게 열심히해요' 를 한 100번 정도 한 것 같다. 내가 살집인데 지가 뭐라고. 그래서 한번 더 생각했다. 정말로 멋지고 기깔나게 만들어봐야지. 



짧게 살아도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한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아빠도 똑같았다. 벽지를 왜 뜯냐, 뜯지 말아라. 그래서 주변에서 짧게 살아도 멋지게 살아보라고 응원해주는 게 많이 힘이 됐다. 엄마도 '하루를 살아도 예쁘게 해놓고 살아야된다는데, 어쩌겠어. 엄마가 밥이나 사줄게' 했다. 그마저도 공사기일(?)을 맞추기 위해 잘 못챙겨먹었다. 사실 나도 후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완벽한 거짓말일 것이다. 계속 현타가 밀려왔다. 왜 이런걸 하고 있을까. 왜 이렇게까지 오래걸리는 일을 선택했을까. 그러면서도 핸디코트를 발라 하얗게 변한 벽을 보면서 흐뭇했다. 가구와 집기들을 사면서 멋진 집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빨리 공사를 끝내고 싶어졌다. 짧게 살아도 멋지게 살아야지. 독립일기를 써보기로 결정했다. 



p.s '나는 돈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사람치고 정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없다.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그것일 뿐 실제가 아닐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떻게 아냐고. 계속 속으로 '좆됐다'를 외치면서 가족들한테는 '재밌어서 하는거야.'라고 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