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차도 상수가 아닌 삶에서 변수들을 바라보는 날

2022. 3. 27. 12:59독립시선일기

코로나 격리해제 하루 전날.
증상도 없고 답답해져서 방격리를 끝내고 집격리로 확장시켰다. 오랜만에 방이 아닌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아빠는 오늘도 종편 뉴스를 틀어놓고 대통령을 욕하는 앵커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이어폰을 낄까, 싶었다. 아빠는 '중년 남성'이 되었다. 트렌치코트를 멋지게 입고, 술보다는 커피를 즐기는 맛을 알며, 카페 직원에게도 낮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슬프게도.. 등산복을 즐겨입으며 1호선에 앉아있을 법한.. 그런 아저씨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저씨'로 늙어버렸다는 얘기다.


이달 초 언니가 코로나에 걸렸다.
코로나에 걸리기 전날 언니는 술을 마시고 열두시가 넘어서 들어왔는데 천둥처럼 야단을 쳤다. 결국 요지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한숨소리가 들려왔고 언니는 말없이 “그럼... 나 나갈까.” 하며 순하게 대답했다. 쏘아붙이기라도 하지, 언니는 늘 착하다.

언젠가 비슷한 날이 있었다. 그날은 언니가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고 아빠는 그날도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그때 그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언니를 걱정한 마음을 화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걱정했다'는 감정을 분노로 표현하는 아빠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대체로 그 맥락의 감정들을 잘 이해했다. 내 부모세대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나는 그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받는 이들의 연약함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날선 말을 우회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해서 얻은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며칠전의 이 모습을 보면서 언니와 나의 터울만큼, 나에게도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나는 연애도 다시 해보고 기회가 된다면 웨딩드레스를 입고 축하를 받으며 운이 좋다면 아이까지도 낳아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굳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틸 이유는 없으니까. 하며


결혼이라는 것
나의 직장은 상당히 결혼 장려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다들 일찍 결혼하는 분위기고, 결혼하면 이것저것 받을 수 있는 복지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으레 당연히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로 회사에서 하는 얘기의 절반이 '시선씨도 결혼해야지.'였다. 한동안 거기에 절여져있다가 코로나 격리로 빠져나와보니 다시 제정신이 든다. 결혼을 해야할까, 생각하는 날엔 아빠를 보면 된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 코가 막히면 젖은 휴지를 대어주던 자상한 사람이었다. 엄마와 장난을 치기도 했고, 무서울 때도 많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아빠와의 기억이 많다. 내가 원하던 옷은 아니었어도 꼬마애의 옷을 사준 것도 아빠였고, 애 혼자 결혼식장에 데려가면 홀아비처럼 보인다며 한 소리를 들어도 결혼식장에 데려간 것도, 부동산에 관심이 생겼을 무렵 아파트 구경을 다니던 것도, 아빠친구들 사이에 껴서 여행을 데려갔던 것도, 눈이 올라갈 정도로 머리를 꽉 쫌매주던 것도 모두 아빠였으니까. 나는 참 아빠를 많이 따라다녔다. 공교롭게도 현재 직업도 아빠의 퇴직 전 직업과 동일하다. 나는 이 직업을 가진 아빠를 멋지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빠는 나의 영웅이었다.
그는 1999년, 학부모 일일강사로 우리 반에 온 적이 있었다. 회사의 홍보비디오를 가져와 쑥쓰러운 얼굴로 교단 앞에 서있던 아빠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의 아빠는 정말로 근사했다.

아빠는.. 근 10년새 많이 변했다. 물론 나쁜 쪽으로. 유난히 멋지던 눈가 주름도, 웃을 때 시원하게 올라가던 웃음도 못본지가 너무 오래됐다. 하긴, 아빠는 원래도 집에서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 역시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상수로 살아갈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해가며 성장하고 때로는 무너지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무섭다. 지금은 어떻게 저떻게 잘 살아가고 있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변해갈 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늘 무너질 것만 같다. 매번 나의 변수를 극복하고 이겨내야하겠지. 그게 내 인생의 숙제다. 근데 이 게임에 플레이어 한 명을 더 넣는다면 어떨까? 이 사람이라면 믿어봐도 좋겠다 싶은 사람일지라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나의 아빠처럼.

생각해보면 나는 아빠를 참 좋아했다. 근데 변한 그를 보며, 내 영웅의 몰락을 보며 생각한다.
내 인생의 변수는 나 하나로 족하다고.